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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10-2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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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번 출구'의 지하도에서 마주치는 '걷는 남자'입니다. 흰 셔츠에 검정 바지, 모나미 볼펜 복장을 한 이 남자가 웃고 있다? 어서 돌아가세요!/NEW
영화 ‘8번 출구’는 지하도 0번 출구에서 시작해 대학생1000만원대출 8번 출구로 나가면 끝나는 비디오게임이 원작입니다. ‘아니 그게 게임이 돼?’ 하실 수 있는데, 나가는 게 쉽지 않거든요. 다음 출구로 전진하려면 주위 사물을 관찰해서 뭔가 이상한 게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이상 없으면 전진, 이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후진. 후진해야 하는데 전진하면, 이제까지 전진한 게 모두 꽝이 되고 0번에서부터 다시 시작, 관 지원제한대학 찰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으면 같은 자리를 맴맴 돌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영화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 중인 주인공 남성(이름 없습니다. ‘헤매는 남자’라고만 나와요)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무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그 음악이 라벨의 ‘볼레로’입니다. ‘볼레로’의 익숙한 스네어 드럼 소리가 들리자마자 퇴직금 “이건 너무 노골적인 선택인걸”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17분간 똑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볼레로’는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될 주인공의 처지를 대놓고 알려주고 시작하는 거니까요.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도 어떤 남성 승객의 고함이 들립니다. “모두에게 민폐잖아! 그치게 해! 돌아버리겠네!” 어린아이를 안고 탄 여성 승객에게 지르는 고함이었어요. 애가 막 울었거든요. 흘낏 돌아봤던 남성이 다시 음악을 들으려는데 전화가 옵니다. 마지못해 받으니 전 여친의 목소리. “아기가 생겼대.” “뭐? 어쩔거야?” 아, 출근길 통화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네요. 내릴 역에 도착한 남자.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중에 통화가 끊깁니다. 그리고 ‘통화권 이탈’. 이제 남자는 갇혔습니다. 규칙대로 문제를 풀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한루프에.
영화 '8번 출구'에서 주인공 남자(이름 없이 '헤매는 남자'로만 소개됩니다)가 안내사항을 읽고 있습니다. 무기력해보이기만 하는 이 남자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NEW
남자가 찾아야 하는 것은 일종의 틀린그림찾기인데요, 예를 들어 지하도 벽에 포스터가 걸려있는데 그 포스터가 순서대로, 아무런 변화 없이 잘 걸려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포스터 그림이 다른 게 붙어있진 않은지 커지진 않았는지 색이 변하진 않았는지 등등. 자, 이 대목에서 이런 말씀하시는 분 계실 듯. “아니, 폰이 안 터져도 사진은 찍을 수 있는데 그거 사진 찍어 대조하면 되는거 아냐?” 주인공 남자도 당연히 이 생각을 합니다. 포스터마다 일일이 사진을 찍어요. 그런데 그렇게 쉬우면 재미없겠지요.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려 하니 모두 지워졌습니다. 누군가 얼레리꼴레리라도 하듯.
정신을 수습한 남자는 걸려있는 포스터, 즉 치과 홍보, 에셔 전시회, 법무사 알림, 고수입 알바 구인, 지하철 에티켓 홍보 등등의 순서와 그림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아갑니다. 이때 지하철 보관함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누가 지하철 보관함에 애를 넣어놨단 말인가.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한 소년. 이 와중에 전 여친까지 남자 앞에 등장합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요. 이건 꿈일까요, 생시일까요.
‘8번 출구’는 반복이라는 설정을 제목에서부터 박았습니다. 지하도 포스터에 들어간 에셔의 작품(제가 아래에 보여드린)은 1963년작 ‘뫼비우스의 띠 II (붉은 개미)’입니다. 포스터 딱 보시면 왜 이 영화 제목이 ‘8번 출구’인지 보이시죠. 무한히 반복되는 고리 모양이 8자잖아요. 그니까 다른 출구가 아닌 8번 출구를 벗어나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에셔(1898~1972)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 이미지로 유명합니다. ‘인셉션’에 나온 끝없이 반복되는 계단 기억나실 거에요. ‘오징어게임’의 미로 계단도 에셔 그림이 모티브입니다.
영화 '8번 출구'에 나오는 포스터 중에는 에셔의 전시회 포스터가 있습니다. 감독이 잘 골랐네요. 시각적으로도 영화의 내용을 잘 전달해주고 있죠.
아마도 ‘8번 출구’ 감독은 개인의 도덕적 선택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도 얘길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일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겐 반복되는 일상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죠. 지하도에 갇힌 ‘8번 출구’의 주인공은 묻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나를 무한루프에 빠뜨린 게 아닌가, 직시해야 할 때 외면하고, 쳐다봐야 할 때 고개 숙였던 게 아닌가, 하고요.
빠져나오려면 ‘8번 출구’의 주인공이 그랬듯 ‘이상 현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이 똑같아서 지루하다, 의미없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똑같지 않은데 유심히 보지 않아서 놓쳤던 건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놓쳐버린 것들 중에 내 일상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혹은 의미있게 만들어줄 실마리가 있었는지도요. ‘8번 출구’의 마지막, 주인공의 선택은 예측 가능하긴 했지만 명확한 감독의 메시지만큼이나 깔끔해서 어울리더군요.
라벨의 ‘볼레로’는 스네어 드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리듬을 연주합니다. 악보 안 외워도 되겠네, 꿀잡이네 하실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게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리듬을 내내 틀리지 않고 연주하려면 엄청난 집중과 열의 없이는 힘들테니까요. ‘볼레로’의 멜로디는 단 2가지뿐입니다. 리듬은 하나, 멜로디는 2가지. 그런데도 ‘볼레로’는 명곡이지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누가 지휘하느냐에 다르게 들리고. 여러분이 지휘하는 여러분의 일상도 날마다 똑같아서 다르고, 똑같이 달라서 의미 있는 날이 되시길.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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