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종이라는 피부암을 앓다가 인간의 도움을 통해 세상을 떠난 개 호두. 인간의 돌봄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지 못하고 수명과 고통을 동시에 연장해야 하는 동물에게 안락사는 필요한 죽음이기도 하다. 최태규 제공
# 그날 아침
2017년 8월, 반투명한 유리창으로도 눈부시게 볕이 드는 아침이었다. 내 개 호두는 좋아하는 꽃무늬 소파에 엎드려 조금 가쁜 호흡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소파 앞에 깔고 잤던 이불을 걷지 않고 게으른 자세로 호두를 올려다봤다. 작은 방에서 서로의 호흡은 서로의 얼굴을 동공에 비춰 볼 만큼 가까이
바다이야기오락실 닿아있었다. 호두가 내뱉는 숨은 시큼달달하게 내 얼굴을 덮었다. 언젠가부터 가빠진 호흡은 그가 아프다는 신호였다.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호두를 흥분시키지 않는 자세로 한참을 멈춰있었다. 햇빛에 비친 먼지가 보이도록 적막한 가운데 곧 멈출 그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침밥을 챙겨주려 몸을 일으켰다. 1년 남짓, 아침저녁으로 먹는 캔은 소
바다이야기예시 화기 질병이 있는 개들에게 먹이는 습식 사료였다. 내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는 그 캔을 잔뜩 주문해놓고 썼다. 건사료보다 맛있어서 웬만한 약은 꿀떡 삼키게 하는 맛밥이다. 호두는 하루 두 번, 반 캔씩을 나누어 먹었다. 호두는 조리하지 않은 떡갈비 같은 질감의 습식 사료를 여느 개처럼 좋아했다. 약을 먹이기 위해 주는 보상이자 속임수였다. 호두는 아침저녁으
바다이야기부활 로 진통제를 먹고 있었다. 관절이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처음엔 계단을 꺼리다가, 걷는 시간이 줄었고, 가끔은 마당까지 나가기 전에 집 안에서 오줌을 눴다. 죽을 정도의 통증은 아니라도 닿고 싶은 곳까지 마음껏 걸어나가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에는 습식 사료에 진통제를 끼워 넣지 않았다. 맛있는
바다이야기부활 습식 사료 사이에 알약이 걸리적거리는 경험을 굳이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통제가 몸에 퍼지는 데 한 시간은 걸린다. 한 시간 안에 나는 이 개의 몸에 바늘을 꽂고 마취제를 주사하고 호흡을 멎게 하는 약도 주사할 계획이었다. 호두의 마지막 아침 식사는 신나고 빠르게 끝났다. 죽느냐 사느냐를 따지기엔 우악스러운 식욕이다. 입 주변에 젖은 사료 부스러기를
바다신2게임 도시락처럼 묻힌 채로 내 손과 얼굴을 핥았다. 나도 호두의 도시락을 손으로 핥듯이 닦아 입에 넣어줬다. 먹지도 못할 도시락은 왜 싸냐고.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온 식구가 방에 모였다. 마지막 인사 시간이다. 그 마지막은 인간에게만 유효하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어야 존재하는 마지막이다. 호두에게도, 같이 사는 고양이 모모에게도 마지막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사랑이 넘치는 아침이다. 인간만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게 눈물을 흘리고, 호두는 슬픔을 혀로 닦아준다. 인간의 얼굴을 핥아주는 느낌은 언제나 짜릿하다. 호두의 침에 털이 척척하게 젖는 걸 지긋지긋해하는 모모도 호두의 혀를 용인하며 평소보다 고조된 분위기를 즐기는 듯 가까이 꼬리를 말고 곁에 앉았다.
# 늙은 개의 몸과 마음
그의 콧잔등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그날로부터 1년 전에 알았다. 흑색종(Melanoma)이라 부르는 피부암이었다. 당장의 통증은 없지만 전이성이 강하고 예후가 나쁜 암이다. 교과서적으로 흑색종 제거는 종양의 경계로부터 1∼2㎝까지 정상 조직을 도려내야 했다. 피부와 뼈 사이에 연부조직이 적은 부분이라, 위턱(주둥이 위쪽)의 반을 뼈까지 날려야 하는 수술이 지시되었다. 나와 학교를 같이 다녔던 수의사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3∼6개월 정도 수명을 예상했다. 수술을 한다면 위턱을 잘라내는 수술을 견디고, 수술 후 위턱이 사라진 상태에 적응하면서, 별일이 없다면 자연수명으로 예상되는 1∼2년을 더 살게 될 터였다. 판단은 무척 간단했다. 아프지 않은 현 상태에서 아픈 (수술) 상태를 만들어 개를 고생시키는 것은 개의 경험과 무관하게 개와 함께 더 살고 싶은 개 주인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위턱을 잘라내는 수술은 질병을 이해하지 못하는 호두에게 가장 큰 재난으로 경험될 것이다. 수술은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호두는 수술이나 항암 없이 종양으로 고생하지 않고 1년을 더 살았다.
사실 수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 안락사에 대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안락사는 돌이킬 수 없는 동물의 고통과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하는 일인데, 동물이 어떤 상태에서 얼마나 아픈지 그 시절 수의과대학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상식적으로 그만하면 동물이 무척 아프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동물병원에서 아픈 동물들을 마주하면서 억지로 살려두는 수의학적 개입의 문제를 깨달았다. 늙은 동물들의 몸이 쓸 수 없게 되어도 온몸에 바늘을 꽂고 살려두는 건 대개 보호자들의 불합리한 욕망이었다. 호두가 얼마나 아파질지를 함께 사는 사람과 본격적으로 아프기 훨씬 전부터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우리는 호두가 시간의 강을 건너는 순간을 온전히 슬퍼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람도 늙으면 관절이 아프다. 자연스러운 노화다. 야생동물이라면 노화와 함께 이미 먹이를 구하지 못하거나 경쟁자에게 밀려 삶이 끝났을 나이지만, 사람이나 사람과 함께 사는 동물은 관절이 너무 아파 움직이기 어렵더라도 누군가 도와 통증을 덜고 밥을 먹여 살린다. 개는 사람이 살린다. 종양이 발견될 즈음 호두는 걸음걸이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언어로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느려진 발걸음으로 그가 경험하고 있을 통증을 가늠해야 했다.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고 용변을 보거나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면 중증 통증의 증거로 본다. 늙은 개의 몸에 암덩이가 얌전하게 머무는 1년 사이, 관절은 제 수명을 다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호두는 주사기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안다. 인지능력이 개 정도 되는 동물은 주사기에 한 번만 찔려봐도 주사기를 든 인간이 가까이 나타났을 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금세 학습한다. 호두는 13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백신과 사상충 검사를 위한 채혈을 했으니 주사기 포장만 뜯어도 아차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약은 미리 주사기에 담아 호두가 볼 수 없는 경대 위에 두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약이 몸속에 들어가면 더 불쾌하기 때문이다. 여느 동물병원에서나 다들 신경 쓰는 일이다. 동물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동물의 뇌에서 불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궁리를 한다.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려는 일이 무엇인지 잘 속이는 것은 동물을 위한 일이다.
# 내 개를 죽이다
경대 위에 올려두었던 주사기 속 마취제는 이내 상온과 비슷한 온도로 찬기가 가셨다. 아침밥을 배불리 먹은 호두는 유난히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한 아침, 마당에서 방광의 압박감도 해소하고 나서 걷지 않은 이불 위에 함께 누워 내 왼팔을 베고 만족스럽게 혀를 빼물며 잠들었다. 신뢰하는 인간의 신체를 베고 눕는 개의 마음은 잠에 들어도 곁을 떠나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잠에 들어 더 취약해지더라도 누가 누굴 지키든 서로를 지키자는 약속이다.
호두가 나를 등지고 나란히 가로누우면 한쪽 손은 자유롭게 그를 쓰다듬는다. 호두의 배와 가슴을 크게 문지르고 양 앞다리 사이로 턱까지 손을 넣어 손가락으로 긁는다.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우리는 안전하다. 방바닥에 함께 널브러지던 십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서로의 몸과 움직임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데 충분했다. 나는 팔을 빼지 않으려 애쓰면서 경대 위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개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주사기 몸통을 손에 쥐어 온도를 한 번 더 올린다. 바늘 뚜껑을 열어 마지막 과정을 준비했다.
어깻죽지에 바늘을 슬며시 찔러넣었는데 호두는 벌떡 깨지 않고 슬며시 눈만 치켜뜬다. 이미 통증에 둔감한 몸이다. ‘뭔가 따끔하지만 별일 없지?’ 하고 묻는 눈빛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호두는 나를 믿고 다시 잠에 들었다. 혈액 중 마취제 농도가 올라가면서 호두의 숨소리는 극단의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마취 상태는 잠자는 상태와 달리 깨워도 깨지 않는다. 호흡을 멈추는 약을 주사하기 전에 완전히 마취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흔들어 깨워보지만 개는 미동하지 않았다. 나는 혈관을 잡고 익숙하게 마지막 약물을 주사했다.
수의사·곰보금자리프로젝트 활동가
■ 용어 설명 - 안락사(Euthanasia)
생물학적으로 삶과 붙어있는 죽음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회적 의미가 달라진다. 근대 이전까지 우리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죽음은 평생 살던 공간에서 공동체가 함께 받아들이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명 연장’이 곧 현대 의학의 성과가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죽음은 정복해야 할 영원한 ‘적(敵)’이 되었다. 올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시간은 오지 말아야 할 것이 되어 부정당한다. 그리고 ‘죽임’은 ‘죽음’보다 관문이 하나 더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타자가 의도하여 행하는 사건은 수많은 (농장)동물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마치 없(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진다. ‘안락사’나 ‘존엄사’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구설수가 들곤 하는 말이다. 죽음 자체를 터부로 여기는 지금 한국에서는 ‘좋은 죽음’이라는 어원부터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러나 동물복지의 관점에서 좋은 죽임은 책임 있는 돌봄의 마지막 과정이다. 인간의 돌봄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지 못하고 수명과 고통을 동시에 연장해야 하는 동물에게 안락사는 필요한 죽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좋은 죽임은 동물을 돌보는 자에게 의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