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6일 오후 3시30분경, 잠수사들이 파란색 박스를 가지고 해변으로 돌아온다. 박스를 열자 검은색 두개골이 나온다. 한국인 12명과 일본인 2명이 흰색 장갑을 끼고 두개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린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일본인 잠수사가 말한다. “슬픈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월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에서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수습을 위한 잠수 조사를 마친 잠수사들이 보트를 타고 해변으로 도착
야마토게임하기 했다. 이날 수습한 유골을 담은 파란 박스를 들고 오는 이사지 요시타카 씨(가운데)를 양현 한국 유족회장(오른쪽)이 맞이하고 있다. ⓒ시사IN 최한솔
이곳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북동쪽으로 지하철과 신칸센을 2시간30분 타면 도착하는, 일본 혼슈의 서쪽 끝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
야마토통기계 다. 과거 이 바다 밑에 ‘조세이 탄광’이라는 해저 탄광이 있었다. 1932년에 본격 조업을 개시했다. 1939년 10월 249명을 시작으로 1941년 10월까지 주로 경상북도·대구 출신 조선인 노동자 1258명이 합숙소에 수용되어 조세이 탄광에서 일했다.
그 노동은 ‘강제노동’이었다. 1939년
릴게임무료 10월 조세이 탄광에 온 조선인 17명이 도주했고, 2명은 도주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사무소에서 구타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세이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김원달씨(27)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다. “울타리는 3m 정도 되는 두꺼운 소나무 판자로 둘러쳐져 있고, 그 바깥쪽에는 철조망이 빽빽하게 둘러져 있습니다. 그 울타리 안의
릴짱릴게임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경비도 엄격하고, 어떤 자유도 없으며, 외출도 할 수 없는 구속된 상태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 어쨌든 반드시 탈출해서, 반드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증언·자료집 〈아버지는 바다 밑에〉 3권 13쪽).”
릴게임손오공 조세이 탄광의 예전 모습. 석탄을 배로 실어 나르고 있다. 오른쪽에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제공
“특히 갱도가 얕아 위험한 해저 탄광으로 알려져 일본인 광부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조선인 광부가 투입되게 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조선 탄광’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라고 〈우베시사(宇部市史)〉는 적고 있다. 당시 광산법에 따르면 해수면과 가장 가까운 해저 제4기층의 두께가 5~10m 미만인 경우 제3기층이 40m 이상인 곳에서만 석탄을 캘 수 있었으나, 조세이 탄광은 제3기층이 30m 전후인 얕은 곳을 캐고 있어 조업 자체가 위법이었다. 김원달씨는 앞서의 편지에서 “바다 위를 지나가는 어선의 ‘통통’ 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갱도를 표현했다. 물이 새서 작업을 두 번 중단했다는 증언도 기록에 남아 있다(〈아버지는 바다 밑에〉 1권 5쪽).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고 있었다”
1942년 2월3일 아침 9시경이었다. ‘고오-’ 하는 소리와 함께 갱도 천장이 무너지면서 해수가 폭포처럼 갱도 안으로 쏟아졌다. 광부들은 갱도 입구로 달려갔지만 183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닷속 탄광 안에 산 채로 갇혀 숨졌다. 그 가운데 136명(74.3%)이 김원달씨를 비롯한 조선인이고 47명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희생자 136명 가운데 10대가 4명, 30세 이하가 80명이었다. 희생자 전성도씨의 아들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전석호씨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오전 선생님이 ‘탄광에서 수몰사고가 났으니 바로 귀가하라’고 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 보니, 피야(pier·탄광 내부 환기를 위해 마련된 배기구) 근처에 물기둥이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갱도 입구 부근에서는 모두가 ‘아이고, 아이고’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아버지는 바다 밑에〉 1권 10쪽).”
이 사고는 이튿날 몇몇 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됐을 뿐이다. 회사는 추가 피해를 막겠다며 사고 직후 갱도를 폐쇄했고,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조세이 탄광도 문을 닫았다. 이후 조세이 탄광은 일본과 한국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은 채 오래도록 묻혀 있었다. 바다 위에 우뚝 솟은 ‘피야’라 불리는 배기구 두 개만이 옛 조세이 탄광의 존재를 증언했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 옛 조세이 탄광이 있던 자리에 탄광 내부 환기에 쓰이던 배기구 ‘피야’ 두 개가 남아 있다. ⓒ시사IN 최한솔
그렇게 34년이 지났다. 1976년 12월, 고등학교 교사이던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가 잡지 〈우베 지방사 연구〉 제5호에 ‘탄광에서의 비상-쇼와 17년(1942년) 조세이 탄광 재해에 관한 노트’를 발표하면서 사건의 개요가 처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를 초대 대표로 1991년 3월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단체의 첫 목표는 지역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사고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이었다. 새기는 모임은 희생자들의 창씨개명 전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해, 그해 가을 편지 118통을 한국과 북한의 유족들에게 보냈다. 답장이 17통 왔다. 아버지가 조세이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는 유족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2년 5월 한국 유족회가 결성됐다. 2013년 2월2일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했다.
추모비에 적힌 문구는 다음과 같다.
“1942년 2월3일 이른 아침, 여기 니시키와(西岐波) 해변에 있었던 조세이(長生) 탄광에서 「수몰사고(水非常)」가 일어나 18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산 채로 갱도에 갇혀 희생되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국책으로서 석탄 증산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것은 위험하게 누수 사고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조세이 탄광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희생자 가운데 136명은 일본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토지·재산 등을 잃어버려, 부득이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건너오거나, 혹은 노동력으로서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인 47명도, 많은 이재민과 같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내버려졌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아직까지도 2개 「피야」의 깊은 바다 속에서 잠들고 계시는 분들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특히, 조선인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는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올립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극을 낳은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여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깁니다.”
2월2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모비 앞에 음료수와 꽃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추모비를 건립하던 날 열린 추모집회에서 새기는 모임 사람들이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젖어 있을 때, 한국의 한 유족은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우리 희망은 소박합니다. (···) 아버지를 바다 밑에서 인양해 유골을 고향 땅에 묻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때 야마구치 초대 대표가 예정에 없이 단상으로 올라가 말했다. “유골 발굴은 손댈 수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손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도 들고, 시간도 걸리겠지요. 하지만 유족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 마음을 생각하면 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해야 비로소 이 사업도 끝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야마구치 대표는 그때로부터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말은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한 ‘수중 탐험가’의 도전
야마구치 대표의 뒤를 이은 사람이 현재 새기는 모임 대표인 이노우에 요코 씨(76)다. 이노우에 씨는 고향 나가노현의 히라오카 댐이 조선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의 강제노동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대학생 때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결혼 후 야마구치현으로 이사와 조세이 탄광을 알게 되면서 ‘일본의 인프라는 전쟁 중 동원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뼈로 만들어졌구나’ 깨닫고 41세 때인 1991년부터 새기는 모임 창립 멤버로 활동해왔다.
이노우에 씨의 아버지도 전쟁에 참여했다가 한쪽 눈을 실명했다. 일본 정부는 상이군인들에게 연금으로 후하게 보상했고 이노우에 씨 자신도 그 혜택을 누렸는데, 일본 정부가 조세이 탄광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유골마저 반환하지 않는 것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다. 이노우에 씨는 2013년 2월2일 추모집회에서 야마구치 전 대표가 ‘거기(유골 수습)까지 해야 비로소 이 사업도 끝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유골 수습은 작은 시민단체로서는 너무 큰 과제라 엄두도 못 내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노우에 씨는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피해자 쪽의 마음에 다가가 그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2013년 2월2일의 추모 집회 이후 새기는 모임은 단체의 목표를 유골 수습으로 전환했다.
증언 자료에 근거해 작성한 사고 당시의 모습. 여러 개의 물기둥이 분출하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크라우드 펀딩 홈페이지 갈무리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3년 12월, 한 ‘수중 탐험가’가 우연히 새기는 모임이 올린 유튜브 영상을 하나 봤다. 이사지 요시타카 씨(38)였다. 그는 의대에 진학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든, 매우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이든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선택을 하나씩 쌓아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목표를 성취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수중 탐험가가 됐다. 스포츠 다이빙을 넘어서는 ‘테크니컬 다이빙’을 통해 전 세계 수중 동굴 100여 곳을 조사하고, NHK 프로그램 제작에도 협력했다.
이사지 씨가 우연히 본 영상에서 새기는 모임은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수습을 도와달라며 일본 정부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유골 수습을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탄광이 있던 바다에는 ‘피야’라 불리는 배기구 두 개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사지 씨의 눈에 그것들은 잠수 조사를 하러 들어갈 수 있는 ‘입구’로밖에 안 보였다. ‘왜 여기서 잠수를 시도하지 않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갱도는 낡아가고 유족도 늙어가니, ‘잠수는 빠를수록 좋을 텐데’라고 이사지 씨는 생각했다. 곧바로 새기는 모임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잠수가 가능한지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2024년 7월25일 제1회 잠수 조사가 시작됐다.
2025년 8월 잠수 조사에서, 잠수 뒤 수면으로 너무 빨리 올라오면 잠수병에 걸릴 수 있어 피야 내 대기 장소(감압 스테이션)에서 감압 조치를 하고 있는 모습.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제공
2018년 2월8일부터 진행해온 일본 정부와의 교섭이 6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자, 새기는 모임은 직접 갱도 입구(갱구)를 찾기로 했다. 2024년 9월25일, 과거 조세이 탄광 도면을 바탕으로 지하 4m에 매립돼 있던 갱구 위치를 특정해냈다. 중장비로 파 내려가자 82년 만에 열린 갱구에서 고여 있던 물이 흘러나왔다. “희생자들의 영혼이 넘쳐 나온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잠수 조사 결과, 갱구 쪽은 내부가 무너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결국 피야 두 개 중에서 유골 발견 가능성이 높은 바다 쪽 피야로 접근하기로 했다. 피야 내부에 쌓인 목재와 철근 등 구조물을 제거한 뒤 2025년 8월25일, 이사지 씨의 요청으로 한국인 잠수사 김경수(44)·김수은씨(42)가 자원봉사로 잠수 조사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옛 갱도와 통로를 거쳐 본갱도와의 교차점인 수심 43m의 T자형 구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희생자의 유골을 발견했다. 김수은 잠수사의 말이다. “김경수 잠수사가 앞에서 라인을 측량하면서 가고 저는 뒤에서 살펴보면서 가는데 줄 바로 밑에 대퇴골(허벅지뼈)로 보이는 뼈가 명확하게 있는 거예요. ‘찾았다!’ 외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그런 뼈가 너무 많이 있었어요. 특히 부츠를 신고 옆으로 누워 있는 듯한, 하반신 옷 안이 뭔가의 화학반응으로 빵빵하게 채워져 있는 유골을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뼈만 있는 게 아니라 시신처럼 느껴져서···.” 김경수 잠수사는 “넘어진 것 같았어요. 도망을 오다 익사하지 않았을까요? 빨리 나가서 이걸 보여드려야겠다, 그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세이 탄광이 있던 해저에서 발견된, 하반신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골 모습. ⓒ김경수·김수은 잠수사 제공 영상 갈무리
두 사람은 8월25일 왼쪽 대퇴골(허벅지뼈)·상완골(위팔뼈)·요골(아래팔뼈)을 갖고 나왔다. 이튿날인 8월26일에는 두개골을 들고 왔다. 뼈는 모두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었는데, 석탄이 부착된 탓으로 추정된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 첫 유골 수습이었다. 이노우에 대표는 “유골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확신은 갖고 있었습니다. 83년간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두개골 사진을 1면에 실었다. 현지 경찰은 사람 뼈가 맞다고 확인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유골이 소재한 바닷속 위치나 깊이가 특정되지 않아 조사가 곤란하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새기는 모임은 민간 크라우드 펀딩으로 유골 수습에 드는 비용을 충당해왔다. 유골 발견에 성공하면서 국면이 달라졌다.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추가 수습할 유골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경수·김수은 잠수사에 따르면 두개골과 대퇴골 등이 발견된 유해 1구, 옆으로 누워 있는 하반신이 포함된 유해 1구, 부츠를 신은 다리뼈 2점 등 최소 4구의 유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2026년 1월13일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DNA 감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1월30일에는 일본 후생노동성 관계자 2명이 지질·광산·해양 공사 분야 전문가 5명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조세이 탄광 현장을 시찰했다. 이사지 씨와 새기는 모임이 유골 발견 전부터 계획했던, ‘2026년 2월 잠수 조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84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였다”
2월 잠수 조사의 목표는 확인한 유골들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해저 탄광에서 잠수 조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사지 씨는 알고 지내던 핀란드 출신 잠수사 미코 파시 씨(52·닉네임 ‘미코’)와 타이완 잠수사 웨이 수 씨(58·닉네임 ‘빅터’)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그들은 조세이 탄광에서 함께 조사할 잠수사들을 추가로 모았다. 그렇게 타이(태국)에서 나르칫 끼앗마니시리 씨(44·닉네임 ‘비어’)와 손윗 신라파랏 씨(33·닉네임 ‘가이드’), 인도네시아에서 아우디타 하르소노 씨(44·닉네임 ‘디타’)가 추가로 합류했다. 원래는 6명이 오기로 했으나, 평소 타이완 잠수사 빅터와 함께 잠수하던 태국 잠수사 한 명이 조사 직전 참여를 포기하면서 해외 잠수사는 총 5명이 모였다. 5명 모두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본격 잠수 조사 전날인 2월5일 오후 4시, 이사지 씨와 해외 잠수사 5명이 마을의 작은 시민회관 ‘도키와 후레아이 센터’의 다다미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장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한글로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2018년 태국 탐루앙 동굴에 갇힌 유소년 축구팀 13명을 구조했던 핀란드 잠수사 미코는 이번 조사의 난이도를 묻는 질문에 “난도가 꽤 높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여러 프로젝트에서 보던 서로 다른 어려운 요소들이 한꺼번에 결합돼 있습니다. 이런 조합은 제 커리어를 통틀어 처음 겪는 수준이에요. 시야가 거의 0에 가깝고, 물이 차갑고, 붕괴 위험이 불안정하게 존재하며, 통로가 매우 좁은 협착 구간이 있고, 해야 할 작업 자체가 극적인 데다 기술적인 과업도 많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차가운 환경에서 4시간짜리 잠수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해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위험을 감수하며 유골 수습에 나서는 감정을 묻자, 인도네시아 잠수사 디타는 말했다. “저는 이게 ‘그냥 뼈’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그분들을 존중해야 하고, 그게 저한테는 마음이 무겁고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그래도 여기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같은 질문에 타이완 잠수사 빅터는 이렇게 답했다. “다이버로서 사실 우리 모두는 매번 다이빙에 위험이 따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그 임무를 안전하게 완수하려고 하죠. 그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전부예요.”
2월5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시민회관 ‘도키와 후레아이 센터’에서 다국적 잠수사 6명이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수습을 위한 잠수 조사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왼쪽부터 태국(타이) 잠수사 ‘가이드’, 타이완 잠수사 ‘빅터’, 핀란드 출신 잠수사 ‘미코’, 수중탐험가 이사지 요시타카 씨, 태국 잠수사 ‘비어’, 인도네시아 잠수사 ‘디타’. ⓒ시사IN 최한솔
2월6일 해외 잠수사들이 참여하는 첫 잠수 조사에는 이사지 씨와 핀란드 잠수사 미코, 인도네시아 잠수사 디타가 참여했다. 이날 오전 10시30분경 피야로 향하는 잠수사들에게, 이노우에 새기는 모임 대표는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면 일단 성공이니까, 잘 부탁합니다”라고 밝게 웃으며 배웅했다.
피야가 보이는 갱구 광장 언덕에 재일조선인 2세 서정길씨(84)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여기에서 일했습니다. 옛날에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다 고생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고생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애들은 들으면 안 되니까 자그마한 소리로 하지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여기서 일한 걸 처음 알았습니다.” 서정길씨의 아버지는 사고 직전 조세이 탄광을 그만두었다. 사고 직후 서정길씨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그런 데서 일하면 안 된다고.” 서정길씨는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못했지만 오랜 시간 바다 밑에 있게 해서 (희생자들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유골이) 4구 있다니까 오늘 올라오겠죠, 올라오겠죠.”
일본 각지의 시민들도 조사를 응원하러 갱구가 있는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지난해 2월에 이어 이날 두 번째로 조세이 탄광 현장을 찾은 사이토 유리코 다이토문화대학 국제관계학부 국제관계학과 특임교수(66)는 “일본의 학교교육에서는 식민지 시절에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 같은 걸 별로 가르치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도 잘 몰랐는데, 여기 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식민지 지배나 조선인 강제노동 같은 일이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이노우에 씨 같은 분이 열심히 모임을 이어와서 이렇게까지 갱구를 찾아내고, 잠수사들의 협조를 얻고, 지난해에는 유해도 나오고··· 정말 감동이었어요. 84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이 확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었고, 우리가 역사의 한가운데 함께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DNA 감정을 제대로 해서 유골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진전되고 있고, 시민의 힘으로 여기까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니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2월6일 조세이 탄광 갱도 입구(갱구) 광장에서 대한불교관음종 스님들이 위령제를 열고 있다. ⓒ시사IN 최한솔
일본 돗토리현에서 태어나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2세 박경남씨(76)도 이날 두 번째로 갱구 광장을 찾았다. 조세이 탄광이 있던 피야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전쟁 중에 일본에서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동료들 임금을 받으러 갔더니 ‘조선인에게 줄 돈은 없다’는 말을 듣고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위험한 이 해저 탄광에 그것도 강제로 보내져서, 8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차가운 바닷속에 뼈로 남아 잠들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뼈만이라도 유족에게, 무엇보다 고향으로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 강합니다. 제가 여기서 태어나 자랐는데도 제 동포들은 아직도 바다 밑에 있다는 사실에, 더 빨리 꺼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기 와서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네요.”
오후 3시30분경 잠수사들이 보트를 타고 해변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가지고 온 파란 박스를 열자 입을 벌린 듯한 검은색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세이 탄광에서 나온 두 번째 두개골이다. 두개골과 아래턱, 목뼈로 보이는 뼈와 치아 여러 점을 수습했다. 이사지 씨는 “한 명분의 유골입니다. 사람의 형태 그대로 이어진 상태였고, 장갑이나 부츠 같은 것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체를 인양할지도 망설였지만 우선은 목표한 대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번에 발견한 하반신이 남아 있던 유골과 같은 유골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날 일본에 도착한 한국 유족 12명과 일본 유족 2명이 흰 장갑을 끼고 두개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2월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에서 잠수사들이 수습한 두개골(사진 가운데)을 한국과 일본의 희생자 유족들이 바라보고 있다. ⓒ시사IN 최한솔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로 삼촌 양임수씨를 잃은 양현 한국 유족회장(79)은 “이번에는 더더구나 외국인분들까지 오셔갖고 하시는데 우리가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 추운데 참 환경이 열악하잖아요. 그만큼 열심히 해주신 데 대해서 유족의 대표로서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현 회장은 “민간단체는 기술적인 면이나 재정적인 면이나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유족들의 바람은 일본 정부가 유골을 수습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노우에 대표는 “이사지 씨와 세계의 잠수사들이 함께 유골을 운반했고, 유족도 유골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행운과 준비해온 안전대책 속에서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사지 씨가 다음 날 바다에 들어갈 잠수사들을 유족에게 소개했다. 타이완 잠수사 빅터는 유족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내일 이 임무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오늘 잠수사들이 다녀와 보니 시야가 더 나빠졌다고 해서, 내일은 더 어려운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족들이 박수를 쳤다.
2월6일 핀란드 출신 잠수사 미코 파시 씨가 조세이 탄광이 있던 바닷속 갱도 안을 잠수 조사 중이다. ⓒ미코 파시 촬영(360도 카메라), 이사지 요시타카 제공
잠수 시작 10분 만에 일어난 일
다음 날인 2월7일 오전 10시30분경, 태국 잠수사 비어와 가이드, 그리고 타이완 잠수사 빅터가 보트를 타고 피야로 출발했다. 같은 시각, 피야가 보이는 해변으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인 추모광장에서는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84주기 희생자 추모집회’가 열렸다. 식순이 진행되는 동안 눈발이 거세졌다. 1시간 반쯤 지난 오전 11시58분경, 전날 유골을 수습한 이사지 씨와 미코, 디타가 한국과 일본 학생들로부터 종이학으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받을 차례였다. “유해가 많이 발견되기를, 그리고 잠수사분들이 안전하게 작업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국에서 모은 종이학이었어요.” 학생들과 함께 종이학을 준비한 새기는 모임 활동가 모리 노리후사 씨(76)가 말했다.
종이학을 건네려는 순간 이사지 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나가서 전화를 받은 이사지 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 와요(Come here)! 돌아가요(Go back)!” 이사지 씨와 미코, 디타가 그 자리에서 흰색 밴 안으로 몸을 던져 피야를 향해 달려갔다. 행사 아나운서가 “일단 중지하겠습니다”라며 다음 순서로 넘어갔고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구급차와 소방차가 추모광장을 지나갔다. 오후 12시30분경, ‘스태프(STAFF)’라고 적힌 주황색 조끼를 입은 새기는 모임 우에다 게이시 사무국장(68)이 해변에서 메가폰에 대고 말했다. “(타이완 잠수사) 빅터 씨가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 AED(자동심장충격기)를 가지고 구급대가 (피야로) 가고 있습니다. 의식은 없습니다.”
2월7일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84주기 희생자 추모 집회’에서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종이학으로 만든 목걸이를 건네려는 순간, 이사지 요시타카 씨(맨 왼쪽)가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다. 타이완 잠수사 빅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순간이었다. ⓒ시사IN 최한솔
오전 11시47분경 피야 안. 태국 잠수사 가이드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11시32분 잠수 조사가 시작되고 15분 만이다. 피야 바로 앞에서?‘복스 플러스(VOX plus)’라는 다이빙 숍을 운영하는 지역 잠수사 도다 마사미 씨(49)는 그날 피야 안에서 잠수 조사를 돕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다. “가이드 씨가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가이드’라는 닉네임의 유래가, 태국어와 영어·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통역 역할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본어로 말을 걸면 보통은 일본어로 대답해주는데, 그날은 ‘무슨 일이야?’ 물었을 때 바로 튀어나온 게 모국어인 태국어였어요. 피야에 있는 스태프 중에는 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가이드, 모르겠어! 모르겠으니까 일본어로 말해!’라고 했더니 그다음에 나온 게 영어였어요. 그 내용이 ‘빅터 씨가 고산소혈증에 걸렸다’···.”
같은 다이빙 숍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지역 잠수사 쓰카다 데쓰오 씨(49)는 해변에서 잠수 조사를 지원하고 있었다. “(오전 11시57분경) 피야 위에 있는 스태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좀 큰일이 났다고. 저쪽도 경황이 없는 상태라 제가 ‘큰일이라니 그게 뭔데!’라고 했죠. 뭐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인지 좀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아무튼 이사지도 여기로 불러라’는 말을 들었다기에 알았다고, 그럼 이사지 씨를 데리러 갈 테니 일단 보트를 이쪽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리고 저희 직원에게 이사지 씨를 태우고 해변으로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사지 씨가 와서 보트를 타고 출발했어요.”
이사지 씨가 피야에 도착한 오후 12시5분경, 빅터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12시10분경 피야 내 감압 스테이션에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구급대와 구조대가 보트를 타고 피야에 접근했다. 헬기에서도 대원 두 명이 바다에 내려 피야로 헤엄쳐 갔다. 오후 1시25분경 빅터를 실은 보트가 해변에 도착했다. 빅터는 파란색 막에 가려진 채 구급차에 실렸다. 쓰카다 씨는 “저와 구급대원분이 빅터 씨를 보트에서 내렸습니다. 구급차에 싣기 위한 들것으로 옮길 때 제가 빅터 씨의 두 다리를 잡아서 구급차에 실었습니다. 빅터 씨는 가슴에 붙어 있는 CPR 기계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었고···”라며 목이 멘 듯 말을 멈추고 눈물을 쏟았다. “저밖에 빅터 씨의 마지막을 못 봐서···. 살 수만 있다면 살리고 싶었죠. 그 순간에도.” 오후 1시28분경 구급차가 해변을 떠났다.
2월7일 타이완 잠수사 빅터가 잠수 조사 도중에 경련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리고 있다. ⓒ시사IN 최한솔
추모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피야 맞은편 갱구 광장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여들었다. 새기는 모임 우에다 사무국장이 오후 1시30분부터 이곳에서 열려던 2부 행사를 중지한다고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에다 사무국장은 다시 메가폰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오후 2시에 빅터 씨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새기는 모임은 2월 잠수 조사를 모두 중단하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세이 탄광 희생자를 추모하러 온 사람들이 잠수복을 입은 빅터의 사진 앞에 흰색,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꽃을 놓았다. 그날 저녁 일본 지역 방송에서는 빅터의 사망을 알리는 텔레비전 뉴스가 반복해 흘러나왔다.
다음 날인 2월8일 오전 10시, 피야와 추모광장 사이에 있는 ‘신우라 회관’이라는 시민회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처음으로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자리인 만큼 취재진 수십 명이 작은 회관을 빼곡히 채웠다. 기자회견장에는 새기는 모임 이노우에 대표와 우에다 사무국장, 변호사 아다치 슈이치, 그리고 이사지 씨가 앉아 있었다. 이사지 씨가 일어나 화이트보드에 ‘hyperoxia(하이퍼옥시아·고산소혈증)’라고 적었다. “이른바 고산소에 의한 경련에 따른 익수(溺水·물에 빠짐)라는 것은 사실로서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세이 탄광처럼 붕괴 위험이 있는 곳에서 잠수사들은 물속에 숨을 뱉어내는 게 아니라 뱉어낸 숨에 산소를 추가해 재이용하는 ‘리브리더(rebreather·재호흡기)’라는 장비를 쓴다. 이때 산소의 압력이 너무 높아지면 신경독성을 일으킨다. 그래서 리브리더는 100% 순수 산소와, 이를 희석시키기 위한 가스를 적절히 조절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빅터는 계속 고산소 상태였다. 산소중독으로 경련을 일으키면 뇌전증 발작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이러면 호흡기가 입에서 빠지고 물이 폐에 들어가 사망하게 된다.
그날은 비어가 가장 먼저 들어갔고, 빅터가 두 번째, 가이드가 세 번째로 들어갔다. 오전 11시32분 잠수를 시작하고 약 10분 만인 11시42분, 잠수해서 첫 번째 게이트를 통과해 갱도로 연결되는 두 번째 게이트에 닿기 직전 수심 32m 지점에서 빅터가 경련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가이드는 앞서 가던 빅터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발견하고는 로프를 이용해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경련으로 손에 힘이 들어간 빅터가 로프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11시47분 가이드는 도움을 요청하러 수면으로 올라왔고, 11시56분 제일 먼저 들어간 비어가 뒤따라오지 않는 빅터를 찾아냈다. 그 시점에 빅터는 로프를 놓고 있었고, 입에서 호흡기도 빠진 상태였다. 비어는 자신도 잠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천천히 빅터를 밀어올리며 수면으로 향했다. 11시58분 전화를 받고 추모광장을 떠난 이사지 씨가 피야에 도착한 오후 12시5분, 빅터가 수면으로 부상했다. 수십㎏에 이르는 장비를 양쪽에 차서 무거워진 빅터를 피야에 있던 잠수사와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겨우 들어 올렸다. 12시10분 장비를 일부 벗겨가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월7일 타이완 잠수사 빅터의 사망 사실이 전해지자 갱구 광장을 방문한 이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시사IN 최한솔
빅터는 ‘리브리더 사용법을 가르치는 강사들의 강사’일 정도로 이 기계의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왜 고산소를 관리하지 못했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이사지 씨는 답했다. “저희들은 원칙적으로 리브리더가 고장이 나도 괜찮도록 준비한 뒤 잠수하고 있으므로, 고장이 난다고 해서 반드시 사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산소라는 상태가 계속 발생했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기계 고장에 기인한 것인지, (조작 실수 등) 그 외의 이유에 의한 것인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으므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수온이 낮아서 문제였는지, 58세라는 나이가 너무 많았던 건 아닌지, 수면에 빠르게 올라온 것이 영향을 줬는지 등을 묻는 질문에 이사지 씨는 모두 관계가 없다고 답했다.
“그는 자긍심을 가지고 잠수를 선택한 것”
기자회견 말미에 이노우에 새기는 모임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이노우에 대표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중한 생명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는 해도, 저희는 저희 나름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그것을 중심으로 앞으로 우선 생각해가고자 합니다. (…) 저희의 유골 수습 그리고 반환, 이 바람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걸 앞으로 어떤 형태로 계속해갈 수 있는가, 그 점에 대해 조금 시간을 두고 검토하고자 합니다. (…) 그는 자원봉사자로서 와주신 것이기는 합니다만, 저희의 프로그램에 찬성해서 와주신 것은 틀림없으므로, 할 수 있는 한 성의를 가지고 보상해가고자 합니다.” 이노우에 대표도 울고, 지켜보던 기자들도 눈물을 훔쳤다.
이사지 씨가 덧붙일 말이 있는 듯 마이크를 들었다. “그는 제가 하는 일에 협력하는 게 기쁘다고 말하며 와주었습니다.” 내내 담담하던 이사지 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팔로 눈을 가렸다. 이노우에 대표도, 우에다 사무국장도 옆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사지 씨가 말을 이었다. “그는 자기의 책임으로, 자신의 의지로 참가해주었으니까, 그런 가운데 제가 마음대로 슬퍼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저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잠수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를 들면 이노우에 씨의 탓도 아니고, 한국 유족이나 일본 유족분의 탓도 아니고, 일본 정부가 지원을 하지 않아서라든가, 한국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서라든가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잠수했고 그 결과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이야기이며, 그가 그 판단을 내린 이유를 제3자가 마음대로 붙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자긍심을 가지고 이곳에서 잠수하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2월8일 이사지 요시타카 씨(가운데)가 타이완 잠수사 빅터에 대해 발언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은 ‘새기는 모임’ 이노우에 요코 대표. ⓒ시사IN 최한솔
조세이 탄광에서 일하다 희생된 일본인 쓰네니시 하쓰타다 씨(당시 27세)의 아들 쓰네니시 가쓰히코 씨(84)는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나흘 뒤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아버지의 유골을 모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2월8일 조세이 현장에 나와 있던, 희생자의 손자이자 가쓰히코 씨의 아들인 쓰네니시 도모히코 씨(60)는 아버지가 빅터의 죽음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했다며 말했다. “84년 전 사고가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그게 가장 원통합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새기는 모임이 잠수 조사 지원을 요청할 때마다 일본 정부가 되풀이한 말이 있다. 하나는 “매몰 위치나 깊이가 명확하지 않아서 조사가 곤란하다”라는 것이다. 유골 발견으로 이 해명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일본 정부는 또 다른 이유에 기대 소극적 태도를 유지해왔다. “80년 이상 전에 붕괴 사고가 발생한 해저 갱도의 통로이기 때문에, 잠수해 조사·발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안전성 관점에서 우려가 있다(2025년 11월14일 우에노 겐이치로 후생노동장관)”가 그것이다.
이번 사고는 일본 정부가 우려했듯 조세이 탄광 갱도가 무너져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고는 갱도 진입 전에 산소 조절 문제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잠수 작업 자체의 위험성을 상기시킨 것도 사실이다. 사고가 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2월7일 아침 〈시사IN〉 취재진을 태운 택시 기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원래는 추모비를 세우고 오래오래 잊지 말자는 취지였지 갱구를 파서 유골을 꺼내자는 건 없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걱정해요. 저러다 또 사고 난다고.” 사고 다음 날인 2월8일, 어린 시절 조세이 탄광 사택에 살았다는 택시 기사 데미 씨(62)는 취재진에게 말했다. “일본 정부가 DNA 감정에 협력하려는 시점에 이런 사고가 났으니, 반드시 한발 물러날 거예요. 위험이 따르는 유골 수습보다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추모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재일조선인 3세인 유영향 새기는 모임 운영위원(36)은 사고 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사고를 전한 뉴스 기사에 입에 담기 어려운 악플이 달려요. ‘일본 정부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을 안 들은 너희들이 나쁘다’ ‘80년 전 죽은 사람의 뼈를 가져오려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였다는 걸 잊지 말아라’···. 이번 사고가 있기 전에도 ‘80년 동안 자고 있는 사람들을 굳이 왜 깨우느냐’ 같은 댓글이 달리곤 했어요. 희생자들이 결코 편히 잠들어 있을 리 없는데도.”
1월13일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이날 양국 정부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DNA 감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교도통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골 수습 프로젝트에 기꺼이 힘을 보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갱구 광장에서 만난 전직 교사 다카오카 히로코씨(79)는 “이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보도할지가 걱정됩니다. 아마도 앞으로 ‘유골 수습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하면 정말 분하고 억울해요. 일본 정부가 ‘중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라고 전망했다. “기껏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 와서 조세이 탄광 문제를 언급해줘서 그 영향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최소한 사람으로서 DNA 감정에 협력한다는 건 상식이잖아요. 이번 일 때문에 그 흐름이 바뀌어버릴까 봐, 너무 안타깝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니 우리 모두는···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제 뒤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보고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할 겁니다.”
사고 당일 각각 피야와 해변에서 대응을 맡았던, 다이빙 숍 ‘복스 플러스’ 사장 도다 씨와 이곳 직원 쓰카다 씨는 이사지 씨의 부탁으로 2025년 7월 첫 잠수 조사부터 장비 준비와 운반을 도왔다. 피야 내부에 쌓여 있던 철근이나 목재 같은 구조물을 제거해 비로소 잠수 조사가 가능하게 만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다. 갱도로 향하는 옆 구멍을 찾아내기도 했다. 도다 씨는 말했다. “저희 둘 다 여기가 고향은 아니어서, 피야에 대해서는 ‘옛날에 탄광이 있었고 그때 굴뚝 같은 거래’ 정도의 정보만 있었습니다. 이사지 씨의 말을 들었을 때 ‘저 안을 좀 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고, 게다가 그것이 유골을 수습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대단한 일이다 싶어서 기꺼이 돕겠다고 했습니다.”
이들 역시 빅터의 죽음 이후에도 가능하다면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쓰카다 씨의 말이다. “빅터와 같이 잠수했던 가이드와 비어에게도 ‘이 프로젝트로 다시 오게 된다면 또 올 거냐’고 물어봤는데요. 당연히 온다고, ‘전혀 문제없이 또 오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이건 제 의견이고 마음이기도 한데요. 결국 빅터 씨가 무엇을 위해 일본에 왔고 무엇을 위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지, 그 의의라는 게 있잖아요. 여기서 멈춰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 거고, 그러면 ‘그는 도대체 뭘 하러 일본에 온 거냐’는 말이 되어버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명예도 그렇고 존엄도 그렇고, 역시 그를 위해 어렵더라도 계속 이어가주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희생자 유골 수습을 돕고 있는 다이빙 숍 ‘복스 플러스’의 도다 마사미 씨(왼쪽)와 쓰카다 데쓰오 씨. ⓒ시사IN 최한솔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이사지 씨는 X(옛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시민단체나 유족이 잠수 조사를 계속 진행하길 원한다면 저는 힘을 보태고 싶고,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면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84년 전 숨진 이들의 유골을 수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사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손이 닿을 거리에 슬퍼하는 유가족이 있고, 유골을 돌려주려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하면 분명히 도움될 수 있다는 것. 저에겐 그게 전부입니다. 심지어 유골이 이미 발견되고 있으니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잠수함으로써 그 슬픔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수 있다면, 제가 해서 가능해진다면 저는 하고 싶습니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 183명 중에는 조선인 136명뿐 아니라 오키나와 출신도 5명 있다. 오키나와 출신 조세이 탄광 희생자의 DNA 감정을 돕고 있는 구시켄 다카마쓰 씨(72)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외지인에게 시키는 구조였다”라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전몰자 유골 수습과 DNA 감정을 담당하는데, 조세이 탄광 희생자는 전몰자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는 틀렸습니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은 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 정부의 석탄 증산 정책, 즉 국책에 따라 일하다 희생된 분들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열악한 환경에서 도망칠 수도 없게 일을 시킨 것은 위법입니다. 조세이 탄광은 해저 가까이까지 무리하게 채굴하다 천장이 얇아져 붕괴되었는데, 그 무리의 원인도 결국 전쟁입니다.” ‘산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구시켄 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죽은 사람을 ‘구해주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가족이 장례를 치러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존엄하게 모셔질 권리가 있습니다.”
2월7일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84주기 희생자 추모집회’가 열리는 추모 광장에 희생자들의 영정이 놓여 있다. ⓒ시사IN 최한솔
일본 각지의 강제연행 역사를 20여 년간 취재해온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니시나카 세이이치로 씨(62)는 조세이 탄광 현장의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재판이나 현장 조사로 배우는 것과 달리 이렇게 눈앞에서 추모비가 세워지고, 유골이 수습되고, 단계를 밟아가며 실시간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접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고, 오키나와 사람도, 북한에서 온 사람도 ‘유골이라는 흔들릴 수 없는 사실’과 동시에 함께 마주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현재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례입니다.”
앞으로의 유골 수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날 상황이 되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정부가 협력해 설비나 훈련, 재정 지원을 함께 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위험을 알면서도 신중히 진행해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위험하니 그만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닙니다. ‘신중하게 합시다, 우리도 더 협력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모르겠지만요. 재발 방지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시민이 중심이 되어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를 시민과 정부, 일본과 한국이 제대로 논의해나가야 합니다. 이번 일을 통해 기억으로 남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사실을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역시 목숨을 거는 일이군요.”
바닷속 조세이 탄광의 본갱도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에서 발견된 벽돌문. ⓒ이사지 요시타카 제공
새기는 모임은 DNA 정보 31건(일본인 희생자 2명, 조선인 희생자 27명)을 2025년 10월 경찰청에 제출했다. 한국 정부는 중복분을 제외하고 희생자 57명의 DNA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새기는 모임과 합치면 희생자 83명분의 데이터가 있다. 한·일 정부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DNA 감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DNA 감정을 하려면 유골을 인양해야 한다. 그 작업을 지금까지는 새기는 모임이 감당해왔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족뿐 아니라 주로 일본에서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기부자들도 70~80대로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 2월10일 우에노 겐이치로 일본 후생노동장관은 이번 잠수사 사망사고에 대해 “후생노동성으로서는 앞으로도 유골 수습을 위한 잠수 조사 등의 안전성에 관한 전문적 지견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대응해나가고자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2월11일 유족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에서 빅터의 장례식이 열렸다. 2월13일 유족들이 빅터의 유골과 함께 타이완으로 돌아갔다. 새기는 모임 이노우에 대표는 빅터의 유족이 남긴 말을 전했다. “빅터 씨가 생전에 왜 여기에 왔느냐 하면, 더 많은 분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안심·안전 확보를 철저히 한 뒤에 활동할 수 있다면, 이런 활동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니 부디 계속해주셨으면 합니다.” 빅터는 이사지 씨에게 이 프로젝트를 처음 듣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This is something we should do).” 그의 마지막 다이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누가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가. 산 자들에게 남겨진 질문이다.
2월5일 기자회견에서 타이완 잠수사 빅터(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그는 2월7일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골 수습을 위한 잠수 조사 도중 사망했다. ⓒ시사IN 최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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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홈페이지:
www.chouseitankou.com/한글-페이지/
우베/글 전혜원 기자·영상 최한솔 PD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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